1877년7월 2일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 남편을 잃고 자신의 아버지 제자로 있던 요하네스 헤세와 32세 때에 재혼하였는데, 그녀가 5살 연상이었다. 요하네스 헤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 빌헬름 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머니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고 헤세의 형제로는 누이 아델레(1875-1949),동생 파울 (1878년 출생 해에 사망), 게르트루트(1879-1880, 같은 이름의 작품이 있다.), 마리(1880-1953) 그리고 한스(1882-1935, 작품 인물 중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이다.)가 있다.1881년-1886년 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했다.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었으며,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갔다.
교육
1880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녔으며,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를 위한 첫 관문 통과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었다.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를 해서 정신요양원 생활을 했다.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을 했는데,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10월 학업을 중단했다.
방황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1904년 『페터 카멘친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일약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친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휴머니스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주의적 태도로 극우파들의 애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독일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전쟁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극우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를 보면서 환멸을 느꼈지만, 아시아 여행경험(1911년)으로 느낀 사해동포주의도 그의 애국주의 반대집필의 배경이 되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소설은 그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님.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 위한 첫 관문 통과.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음.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옴.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됨.
1893년10월 학업중단.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함.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음.
1904년 『페터 카멘찐트』 발표. 출세작으로 경제적 안정 속에서 문학의 길 전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찐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 평전 <복가치오>와 <아씨시의 프란츠> 발표. 마리아 베르누이(1868년-1963년)와 결혼. 그녀는 헤세보다 9살 연상으로 수학가 가정 출신. 그녀와 사이에 세 아들이 태어남. 브르노(1905-?), 하이너(1909-?), 마르틴 (1911년-1968년). 보덴호보근의 가이엔호펜으로 이주.
1919년귀향 발표.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데미안 Demian -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발표. 폰타네 문학상은 신인작가에게 수여하기에 반려. <동화집>, 단편집 작은 정원, 정치평론집 짜라투스라의 복귀 발간. 이 해 봄, 처자와 헤어져 홀로 남 스위스의 몬타뇰라로 이주 후 집필에 전념.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 월간지 <생명의 절규> 공동 편집.